AI 알파고를 상대로 유일한 인간 승리를 거둔 전설적인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이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했다. 넷플릭스 두뇌 서바이벌 예능 ‘데블스 플랜: 데스룸’(이하 ‘데블스 플랜2’)에서 그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과 촌철살인의 언변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색다른 매력을 드러냈다.

 

지난 6일 처음 공개된 ‘데블스 플랜2’는 서로 다른 직업군의 플레이어 14인이 7일 동안 합숙하며 최고의 브레인을 가리는 포맷의 서바이벌 예능이다. 참가자 면면은 물론,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던 이 프로그램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이는 단연 이세돌이었다. 메이저 세계대회 14회 우승, 2016년 알파고와의 대국, 그리고 2019년 은퇴 이후에도 대중의 관심을 끌어왔던 그는 이번 출연으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입증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이세돌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다. 그는 은퇴 이후 작가 활동과 보드게임 개발 등에 주력해 왔지만, 방송에서 얼굴을 비추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 그가 ‘데블스 플랜2’에 출연한 이유에 대해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제작발표회에서도 “바둑 외적인 부분에서는 승부욕을 느껴본 적이 없어 처음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재미있었다”고 소회를 전했다.

 

이세돌은 등장부터 참가자들의 기대와 견제를 한 몸에 받았다. ‘전설의 기사’라는 타이틀과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됐지만, 첫 메인매치 ‘부패경찰’에서는 실책을 인정하며 감옥동으로 향하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러나 데스매치에서 그는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개인 생존이 걸린 대결에서 끝까지 남아 기지를 발휘하며 ‘승부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두 번째 메인매치 ‘언노운’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전략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참가자 간 파벌 구도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기존의 우승 후보를 과감히 배제하는 결단을 내렸다. 동맹 제안에 대해서도 “피스 하나 준다고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 이 바보야”라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거절해 분위기를 압도했다.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담대한 플레이는 프로그램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며 이세돌 특유의 기풍을 전했다.

 

이번 시즌의 참가자 중에는 걸그룹 출신 츄도 있었다. 이세돌은 과거 K팝 아이돌 팬임을 밝혔던 이력이 있어 두 사람의 조합에 관심이 쏠렸지만, 게임에 돌입하면 예외 없이 냉정했다. 친근함을 나누는 듯하다가도 승부에서는 철저히 독립적인 전략을 취하며 ‘예능감’과 ‘승부욕’을 절묘하게 넘나들었다.

 

 

 

그의 이러한 활약은 과거 몽백합배 10번기에서 중국의 구리 9단과 격돌해 총상금 8억 4천만 원을 거머쥐었던 당시를 연상케 한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일부 게임에서 호전적인 성향의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주도권을 뺏기는 듯한 장면도 있어, 바둑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에 적응 중인 듯한 모습도 엿보였다. 같은 감옥동에 머물렀던 참가자 최현준은 “세돌 형이 어느 날 ‘이건 너무 황당하다. 나가서 넷플릭스 고소하겠다’고 농담하더라”며 웃지 못할 비하인드를 전했다.

 

연출을 맡은 정종연 PD는 이세돌을 ‘도파민 중독자’라고 표현하며 “바둑기사들을 오래 섭외해봤지만 이세돌처럼 외향적인 성격은 드물다. 그는 굉장히 솔직하고 승부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이어 “이세돌은 말을 아끼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스타일이라 예능에서도 큰 재미를 준다”고 덧붙였다.

 

문화평론가 김성수 역시 “이세돌은 예능 출연 자체가 의외였기에 더 큰 반전의 재미를 안긴다”며 “넷플릭스와 제작사 TEO, 정종연 PD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캐스팅”이라고 분석했다. 또 “이세돌은 고품격 플레이와 예측불허의 발언, 감정 표현을 모두 아우르는 예능형 플레이어로, 시청자들이 원하는 요소를 완비한 인물”이라며 호평했다.

 

다른 출연자들도 이세돌의 활약을 주목하고 있다. 규현은 예능 ‘살롱드립2’에 출연해 “이세돌은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레전드는 괜히 레전드가 아니더라”고 감탄했다.

 

비단 승부의 결과뿐 아니라, 그 안에서 발산하는 인간 이세돌의 다면적인 모습은 ‘데블스 플랜2’의 재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그가 보여줄 다음 수는 무엇일까. “탈락이 문제가 아니라 우승하려고 오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세돌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